요즘 자극적인 드라마에 좀 지쳐있었어요.
매화 반전에 반전, 소리 지르고 눈물 쏟고 복수하고— 재밌긴 한데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조용하고 편안한 드라마 없나 찾던 참에, 동생이 추천해줬어요.
“형, 마이코네 부엌 봤어? 그냥 밥 만들고 먹는 드라마인데 왜 이렇게 좋지.”
동생 말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첫 화를 틀었어요. 교토 오래된 하나마치(화류계 거리), 마이코(게이샤 수련생)들이 모여 사는 오키야(置屋). 그 안에서 열여섯 살 키요가 조용히 밥을 짓는 드라마.
처음엔 ‘이게 드라마야?’ 싶었어요. 사건도 없고, 싸움도 없고, 그냥 밥 짓고 같이 먹고, 소소한 이야기 나누고. 근데 두 화, 세 화 넘어가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 거예요. 아주 조용하고 은근하게, 근데 아주 간절하게.
드라마가 끝날 즈음엔 이미 새벽 한 시였고, 저는 냉장고 앞에 서 있었어요. 오차즈케 재료를 찾으면서요.
마이코네 부엌이라는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
화려함이 없어서 오히려 더 들어온다
요즘 음식 드라마들은 대부분 비주얼 승부예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복잡한 플레이팅, 초고가 재료. 눈이 즐거운 건 맞는데 어딘가 나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마이코네 부엌은 그 반대입니다.
키요가 만드는 음식은 전부 소박해요. 흰밥에 오차즈케, 달걀말이, 미소된장국, 오니기리, 따뜻한 우동. 특별한 재료도 없고, 복잡한 기술도 없어요. 근데 그걸 화면에서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목구멍 너머에서 뭔가 당기는 느낌이 와요.
왜일까 생각해봤는데요. 아마도 저 밥이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먹어야 할 것 같은 음식’**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루 종일 힘들게 연습하고 돌아온 마이코들이 밥상 앞에 앉아서 처음으로 긴장을 푸는 그 장면. 거기 놓인 음식이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키요라는 캐릭터의 손이 만드는 온도
키요를 연기하는 배우 모리 나나(森七菜)의 요리 장면이 굉장히 자연스럽습니다. 달걀을 깨는 손길, 밥 위에 오차 붓는 타이밍, 국 간 보는 표정. 어설프거나 과장된 느낌이 없어요.
실제로 이 드라마의 음식 감수를 교토 현지 요리 전문가가 맡았다고 해요. 덕분에 음식 장면 하나하나가 공들여 찍혔고, 그게 화면에서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특히 키요가 음식을 내밀 때 아무 말 없이 그냥 내밀고, 먹는 사람이 한 입 먹고 “맛있다”라고 중얼거리는 그 조용한 장면들. 대사도 없고 음악도 잔잔한데, 그 순간이 가장 배고파요. 이상하죠.
가장 침이 많이 고였던 장면 — 오차즈케
새벽에 키요가 끓여주는 오차즈케
제가 마이코네 부엌에서 가장 강렬하게 꽂힌 장면은 오차즈케 장면이에요.
늦게 돌아온 마이코가 피곤한 얼굴로 부엌에 들어오고, 키요가 말없이 일어나서 밥 그릇을 꺼내요. 식은 밥 위에 따끈한 다시(육수)를 붓고, 쓱쓱 섞어서 내밀어요. 거기다 소금에 절인 연어 조각 하나, 와사비 조금, 김 몇 조각.
5분도 안 걸려서 만든 음식인데, 받아서 한 입 먹는 마이코의 표정이— 그게 전부예요. 표정 하나인데 거기서 하루의 피곤함이 싹 녹는 게 보여요.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어요. 잠깐 되감기까지 했으니까요. 왜 이 장면이 이렇게 마음을 건드리지, 싶으면서.
오차즈케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에요. 찬밥에 뜨거운 차나 육수 부어 먹는 음식이에요. 일본 가정에서 남은 밥 처리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술 마시고 들어와서 속 달래는 음식이기도 하고, 감기 걸렸을 때 먹는 음식이기도 해요. 한국으로 치면 숭늉에 밥 말아먹는 것 같은, 그런 포지션이에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데, 그래서 더 진짜 같았어요. 지쳐서 돌아온 사람한테 “뭐 먹고 싶어?” 묻지 않고 그냥 알아서 챙겨주는 그 밥 한 그릇. 그게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하고요.
왜 그 장면이 유독 배고프게 느껴졌냐면
오차즈케 장면에서 카메라가 그릇 위로 내려오는 앵글이 있어요. 흰밥 위로 뜨거운 다시가 천천히 채워지면서 밥알이 살짝 불어오르는 그 순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연어 살이 육수를 흡수해서 색이 달라지는 그 과정.
그 앵글 하나가 머릿속에 온기를 집어넣는 것 같았어요.
저는 어릴 때 아버지가 술 드시고 늦게 들어오시면 어머니가 늘 밥에 뜨거운 물 부어서 내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그게 오차즈케랑 정확히 같은 음식은 아닌데, 그 느낌이 비슷해요. 뜨거운 거 부어서 후후 불어 먹는, 빠르고 따뜻한 그것.
아는 감각이 화면에서 보이는 순간,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뭔가 그리워지는 거예요. 이게 마이코네 부엌이 자극하는 식욕의 정체예요. 화려한 맛이 아니라 따뜻한 기억을 건드리는 거예요.
오차즈케라는 음식에 대해 조금 더
단순한데 단순하지 않은 맛
오차즈케(お茶漬け)를 직역하면 ‘차에 담근 것’이에요. 밥 위에 뜨거운 녹차나 호지차, 혹은 다시 육수를 부어 먹는 음식인데, 지역마다 올리는 재료가 달라요.
교토식 오차즈케는 특히 소박한 편이에요. 절임 채소인 츠케모노, 소금에 절인 연어, 매실장아찌인 우메보시, 와사비와 김 정도. 재료 자체가 강한 맛을 내는 게 아니라, 뜨거운 차와 섞이면서 은은하게 어우러지는 조화가 포인트예요.
처음 먹으면 ‘이게 다야?’ 할 수 있어요. 근데 계속 먹다 보면 이게 진짜 묘하게 자꾸 당기는 맛이에요. 뜨거운 국물이 밥알에 스며들면서 부드럽게 퍼지는 식감, 녹차의 은은한 쓴맛이 짭조름한 연어랑 만나는 조화, 와사비의 코 끝 찌르는 향이 한 방에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느낌.
자극적이지 않아서 위가 무겁지 않고, 따뜻해서 속이 편안하고, 재료가 단순해서 먹고 나서도 깔끔해요. 야식으로 이만한 게 없어요, 솔직히.
아는 맛이라 더 무섭다
오차즈케가 한국에서도 이제 꽤 익숙한 음식이 됐잖아요. 편의점에서도 팔고, 일본 음식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한 번이라도 먹어본 분들이라면 드라마 보면서 그 온도가 기억날 거예요.
뜨거운 거 부으면 그릇이 따뜻해지고, 들고 먹으면 손이 따뜻해지고, 후후 불어서 한 숟갈 떠 넣으면 속이 따뜻해지는 그 연쇄 온도. 그 감각을 아는 사람은 마이코네 부엌 오차즈케 장면에서 버티기가 힘들어요.
저는 결국 못 버텼어요.
새벽 한 시,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드라마 네 화를 연달아 봤어요. 처음엔 한 화만 볼 생각이었는데, 이 드라마가 딱 멈추기가 애매한 게— 사건이 없으니까 ‘다음 화에 뭔 일이 생기지?’ 하는 궁금증보다는 ‘그냥 더 보고 싶다’는 감각으로 계속 가게 돼요.
그러다가 키요가 밤늦게 돌아온 마이코한테 오차즈케 끓여주는 그 장면을 보고 나서, 저도 모르게 소파에서 일어났어요.
냉장고를 열었는데 마침 밥이 남아 있었어요. 점심에 해놓은 거였는데 좀 식어있었죠. 녹차 티백이 있었고, 소금 연어 구운 게 반 토막 남아있었고, 김도 있었어요. 세상에, 재료가 다 있는 거예요.
10분이면 됩니다. 밥을 그릇에 담고, 뜨겁게 끓인 물에 녹차 티백 넣어서 진하게 우려내고, 그걸 밥 위에 천천히 부어요. 연어 살 발라서 올리고, 김 찢어서 뿌리고, 냉장고에 있던 와사비 조금 짜서 옆에 놓고.
앉아서 한 숟갈 떴을 때의 그 느낌. 새벽 한 시에 혼자 앉아서 먹는 오차즈케가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 싶었어요.
밥이 녹차를 흡수해서 부드럽게 퍼지고, 연어의 짭짤함이 은은하게 퍼지고, 김의 바다 향이 코끝에 올라오고, 와사비를 조금 풀어서 섞으면 코 안이 시원해지는 그 감각. 드라마에서 마이코가 말없이 먹던 그 표정이 이해됐어요. 할 말이 없어요. 그냥 먹게 돼요.
주말에 제대로 만들어봤습니다 — 교토식 오차즈케
마트에서 구한 재료들
새벽 오차즈케가 너무 맛있었던 나머지, 주말에 제대로 한번 해보기로 했어요. 교토식 오차즈케를 최대한 따라 해보는 걸로요.
마트에서 구한 재료는 이렇습니다. 소금 연어 한 토막, 호지차 티백(없으면 녹차도 됩니다), 우메보시(매실장아찌, 수입 식품 코너에 있어요), 김, 흰깨, 와사비. 거기에 시판 다시 팩 하나.
일본 오차즈케의 정석은 녹차보다 호지차 쪽이 더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요. 마이코네 부엌에서 키요가 쓰는 것도 아마 호지차 계열일 거예요. 교토 음식 특성상 재료 맛을 방해하지 않는 은은한 것을 선호하거든요.
만드는 법 — 생각보다 훨씬 간단해요
첫 번째, 다시 우리기. 냄비에 물 두 컵 넣고 다시 팩 하나 넣어서 5분 정도 끓여요. 다시 팩 없으면 그냥 물에 멸치 몇 마리 넣고 끓여도 돼요. 여기에 소금 한 꼬집, 간장 반 티스푼으로 간을 아주 약하게 해요. 진하게 간하면 안 돼요, 은은하게 감칠맛만 살리는 거예요.
두 번째, 연어 굽기. 소금 연어를 팬에서 구워요. 겉이 살짝 바삭하게, 안은 촉촉하게. 다 구우면 살을 발라서 뼈 빼놓아요.
세 번째, 밥 준비.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쓰면 더 좋지만, 남은 밥 데워도 충분해요. 그릇에 적당히 담아요. 너무 많이 담으면 육수 비율이 맞지 않아요. 그릇 절반 정도.
네 번째, 조립. 밥 위에 연어 살 올리고, 우메보시 하나, 김 찢어서 뿌리고, 흰깨 조금, 와사비 한 끝.
다섯 번째, 육수 붓기. 뜨겁게 데운 다시를 밥이 살짝 잠길 정도로 부어요. 이때 천천히 붓는 게 좋아요. 급하게 부으면 밥이 흐트러져요. 옆에 호지차 티백으로 우린 차도 준비해두고, 육수 반, 차 반 섞어서 부으면 더 향기로워요.
먹어본 후기
진지하게 말씀드리는데, 이게 이 가격에 이 난이도에 이 맛이 나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메보시가 들어가면서 새큰하고 짭조름한 맛이 확 살아났어요. 연어 구운 게 육수에 살짝 풀어지면서 국물도 더 깊어지고, 김이 촉촉하게 불어서 씹을 때 해조류 향이 올라오고. 와사비를 조금씩 풀면서 먹으면 코가 뻥 뚫리는 그 쾌감이 계속 오고요.
아내도 한 그릇 줬더니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했어요. 마이코네 부엌 덕분이라고 했더니 그 드라마 저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봤어요. 역시 아내도 두 화 만에 빠지더라고요.
마이코네 부엌이 음식에 대해 가르쳐준 것
이 드라마가 묘하게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를 계속 생각해봤어요.
결국엔 이거 같아요. 음식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키요는 요리 학교를 나온 셰프가 아니에요. 그냥 밥 짓는 걸 좋아하는 소녀예요. 근데 키요가 만드는 밥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건,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먹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만들기 때문이에요.
늦게 들어온 마이코가 피곤할 거 알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오차즈케를 준비하고, 오늘 힘든 일이 있었던 친구한테는 좀 더 든든한 걸 준비하고. 그 마음이 음식에 담기는 거잖아요.
나이 오십이 넘으면 화려한 음식보다 그런 음식이 더 그리워지는 것 같아요. 특별한 레스토랑이 아니어도, 누군가 생각하면서 만들어준 밥 한 그릇이 더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마이코네 부엌이 딱 그 지점을 건드리는 드라마예요.
오늘 저녁, 오차즈케 한 그릇 어때요
마이코네 부엌, 아직 안 보셨으면 오늘 저녁 식사 후에 한번 틀어보세요. 넷플릭스에 있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제작에 참여한 드라마라 영상 감각이 남달라요. 교토의 골목, 오키야의 다다미방, 저녁 어스름 속 부엌 풍경이 그 자체로 힐링이에요.
그리고 보다가 배고파지면— 냉장고에 남은 밥 있으면 오차즈케 만들어 드세요. 어렵지 않아요. 차 한 잔 끓이고 따뜻하게 부으면 돼요. 거기에 냉장고 있는 거 하나씩 얹으면 그게 오늘 밤의 수라상이에요.
다음 글에서는 마이코네 부엌에서 키요가 만드는 달걀말이(다시마키 타마고) 장면에 대해 써볼게요. 그 장면도 정말 못 지나쳐요. 달걀말이 하나에 그렇게 오래 공들이는 걸 보면서 나는 왜 달걀말이를 대충 만들었나 반성하게 됩니다.
오늘 저녁은 소박하게, 따뜻하게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