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할게요.
나이 오십 넘으면 야식은 진짜 참아야 합니다. 위도 예전 같지 않고, 다음 날 얼굴이 부어서 출근하면 팀원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봐요. 그거 알면서도— 그 날 밤은 진짜 못 참았습니다.
더 베어(The Bear). 이 드라마, 저한테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에요. 일종의 식욕 자극 고문 장치입니다.
더 베어, 처음엔 그냥 요리 드라마인 줄 알았다
퇴근하고 소파에 누워서 첫 화를 틀었을 때만 해도 별 기대 없었어요. ‘그냥 주방 배경 드라마겠지, 시끄럽겠다’ 싶었거든요.
근데 카르미(Carmy)가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뭔가 달랐어요. 그 긴장감, 주방 안의 소음, 칼 소리와 불 켜지는 소리, 고기 굽는 냄새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그 묘한 감각. 이건 그냥 드라마가 아니구나, 싶었죠.
그리고 2화쯤 됐을까.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 장면이 나왔습니다.
카르미가 오래된 가게의 레시피를 들여다보면서, 형이 남긴 그 두툼하고 육즙 넘치는 소고기를 얇게 썰어 쌓아 올리는 그 장면. 빵에 육수를 흥건하게 적시고, 기아르디니에라(매콤한 절임 채소)를 올리고, 그대로 한입 베어 무는 그 장면.
저는 그 순간 배가 고파졌습니다. 밤 11시 반이었는데.
그 장면, 왜 그렇게 맛있어 보였냐면
카르미의 손이 음식을 살려냈다
더 베어에서 음식이 유독 맛있어 보이는 이유가 있어요. 배우가 진짜로 요리를 합니다. 제레미 앨런 화이트(Jeremy Allen White), 그러니까 카르미 역의 배우가 실제 셰프들에게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손동작이 어설프지 않아요. 고기를 써는 각도, 칼의 속도, 육수에 적시는 타이밍. 이게 다 진짜처럼 보이니까 음식도 진짜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 장면에서 카르미가 고기를 종이처럼 얇게 슬라이스할 때, 결대로 고기가 풀어지면서 쌓이는 그 모습. 거기에 뜨거운 주스를 부으면 빵이 흠뻑 젖으면서 물러지는데 이상하게 징그럽지 않고 먹음직스럽습니다. 오히려 그게 포인트예요. 촉촉하게 젖어있어야 진짜 시카고 이탈리안 비프라는 것.
소음이 식욕을 자극한다
주방 드라마라서 소리가 많아요. 고기 굽는 소리, 기름 튀는 소리, 서로 지르는 소리들. 이상하게 그 소음들이 합쳐지면 배가 고파집니다.
특히 두꺼운 소고기 덩어리가 오븐에서 나올 때 풍기는 뉘앙스— 물론 화면에서 냄새가 날 리 없는데, 볼수록 맡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니까요. 이게 더 베어가 무서운 이유입니다.
형이 남긴 레시피라는 감정선
음식만 맛있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감정이 얹혀 있어요. 카르미가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를 만드는 건 단순히 메뉴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형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려는 몸짓이에요.
그 감정을 알고 보면 음식이 더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샌드위치가 아니에요. 미슐랭 출신 셰프가 내려와서 죽은 형의 가게를 지키겠다고 만드는 음식이잖아요.
그러니 맛있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죠.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 도대체 뭔데 이렇게 난리야
시카고 사람들의 소울푸드
한국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시카고에서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는 떡볶이 같은 겁니다. 길거리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서민 음식이면서, 동시에 그 지역 정체성의 일부예요.
시카고 이탈리안 비프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얇게 슬라이스한 소고기. 두꺼우면 안 돼요. 종잇장처럼 얇아야 제맛입니다. 이탈리안 시즈닝과 마늘, 허브로 천천히 브레이징한 소고기를 차갑게 식혀서 얇게 썰어요.
육수에 적신 빵. 이게 포인트예요. 시카고에서는 이걸 ‘딥’이라고 부르는데, 빵을 육수에 적시는 걸 말해요. 단순히 축축한 게 아니라, 고기와 함께 끓인 진한 육수에 담가야 해요. 안 그러면 반쪽짜리예요.
기아르디니에라(Giardiniera). 이탈리아식 피클 채소 믹스인데, 셀러리·당근·피망·올리브를 오일에 절인 거예요. 이게 없으면 심심해요. 매콤하고 새콤한 기아르디니에라가 기름진 고기와 적신 빵의 묵직함을 확 잡아줍니다.
맛의 레이어가 장난이 아닙니다
먹어본 적 없어도 상상할 수 있잖아요. 아, 저는 마침 작년에 미국 출장 갔다가 시카고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어요. 그때 알 비프(Al’s Beef)라는 유명한 집에서 실제로 먹어봤거든요.
솔직히 처음엔 ‘이게 뭐야, 그냥 촉촉한 샌드위치잖아’ 싶었는데, 한 입 베어 물고 씹는 순간 이해가 됐어요.
소고기가 퍽퍽하지 않아요. 결대로 부드럽게 풀리면서 육즙이 흘러요. 거기에 빵이 육수를 흡수해서 씹을수록 국물 맛이 나요. 위에 기아르디니에라가 올라가면서 아삭아삭한 식감과 식초의 산미가 더해지는데, 이게 기름진 걸 상쇄해줘서 계속 먹을 수 있게 만들어요.
끝에 남는 게 뭔가 짭조름하고 고소하고 약간 산뜻한 여운.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맛이에요. 이걸 드라마에서 봤을 때 시카고 출장 때 먹었던 기억이 확 올라온 거예요.
아는 맛이 무서운 겁니다.
새벽 2시, 나는 결국 냉장고를 열었다
더 베어 3화까지 연달아 봤을 때였어요. 시계는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는 집에서 완벽하게 재현하기 어려워요. 재료도 구하기 힘들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소고기 브레이징에는 몇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새벽 2시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저는 타협했습니다.
냉동실에 있던 소고기 불고기용을 꺼내서 간장, 마늘, 후추, 올리브오일로 빠르게 볶았어요. 냉장고에 있던 바게트 반쪽을 잘라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거기에 고기를 얹었죠. 피클이라도 올리려고 찾았는데 없어서 그냥 먹었어요.
맛있었냐고요?
맛은 있었어요. 근데 더 베어에서 본 그 샌드위치랑은 달랐죠. 당연히. 그래도 그 순간은 충분했습니다. 뭔가를 먹었다는 만족감이랄까. 드라마가 자극한 식욕을 억지로라도 달랜 느낌이랄까.
홈메이드 이탈리안 비프
그 다음 주 주말에 진짜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에 도전했어요.
완벽한 재현은 어렵지만,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충분히 비슷하게 만들 수 있어요.
재료 (2인분 기준)
소고기 목심이나 앞다리살 500g, 마늘 6~8쪽, 양파 1개, 소고기 육수 500ml, 올리브오일, 로즈마리와 오레가노(건조 허브 각 1 티스푼씩), 소금·후추, 그리고 통밀 또는 치아바타 빵.
피클 채소 믹스는 마트에서 파는 올리브 믹스 피클로 대체해도 됩니다. 기아르디니에라 자체는 이태원 수입 식품 가게나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어요.
만드는 법
첫 번째, 고기 브레이징. 목심을 큰 덩어리째로 소금, 후추 두껍게 발라서 냄비에 기름 두르고 겉면을 강불로 지집니다. 전면이 갈색 크러스트가 생길 때까지요. 여기서 서두르면 안 돼요. 이 마이야르 반응이 나중에 육수 깊이를 결정합니다.
두 번째, 육수에 끓이기. 지진 고기를 육수에 담그고, 마늘·양파·허브 넣고 뚜껑 닫아서 약불로 2시간 이상 천천히 끓입니다. 고기가 포크로 찔렀을 때 쑥 들어갈 정도면 됩니다.
세 번째, 썰기. 고기를 꺼내서 조금 식힌 다음 최대한 얇게 썰어요. 결 반대 방향으로. 두꺼우면 식감이 달라집니다. 얇아야 해요.
네 번째, 적시기. 빵을 남은 육수에 살짝 담갔다 꺼내요. 이게 핵심이에요. 흠뻑 젖게 하되,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게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3~5초 정도가 적당했어요.
다섯 번째, 조립. 빵 위에 고기 듬뿍 올리고, 기아르디니에라나 피클 채소 올리고, 원하면 스위트 페퍼 올리면 끝.
후기
완벽하진 않았어요. 육수 깊이가 시카고 현지랑은 달랐고, 기아르디니에라도 완벽한 대체품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진짜 맛있었습니다.
특히 육수에 적신 빵 부분. 집에서 만든 버전인데도 그 촉촉하고 짭조름한 맛이 예상보다 훨씬 좋았어요. 남편한테도 줬더니 “이게 드라마에 나온 거야?” 하면서 두 개 먹었습니다.
더 베어의 또 다른 음식들 — 리가토니 파스타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 얘기를 했으니, 더 베어에서 또 유명한 음식 하나 짚고 가야 해요.
시즌 2의 그 리가토니 파스타 장면.
카르미가 파인다이닝 수련 시절 배웠던 리가토니 알라 보스카이올라(Rigatoni alla Boscaiola)를 재현하는 장면. 버섯·소시지·크림·파마산의 조합인데, 이 파스타가 또 죽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장면 보고 저도 주말에 리가토니 사러 마트 갔어요. 집에 없었거든요. 꼭 리가토니여야 할 것 같아서요. 펜네 있었는데 리가토니 사러 나갔어요. 이 드라마가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크림 파스타지만 느끼하지 않아요. 버섯이 들어가면서 흙냄새 같은 깊은 풍미가 생기고, 이탈리안 소시지의 가벼운 향신료 향이 전체를 묶어줍니다. 리가토니 안쪽에 소스가 꽉 차는 그 느낌이 진짜 포인트.
더 베어가 음식에 대해 알려주는 것
이 드라마 보면서 느낀 게 있어요. 음식은 그냥 재료의 조합이 아니구나, 싶은 거예요.
카르미가 만드는 음식이 맛있어 보이는 건 재료가 좋아서만이 아니에요. 거기에 얽힌 사람의 이야기, 지키려는 것,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감정이 다 담겨 있어서예요.
형이 만들던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 그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카르미가 느끼는 감정들. 그걸 알고 먹으면 같은 샌드위치도 더 맛있어지는 것 같아요.
이게 음식의 힘이에요. 단순한 칼로리가 아니라 기억이고, 관계이고, 감정입니다.
오늘 저녁, 이탈리안 비프 한번 도전해보세요
더 베어 아직 안 보셨으면 오늘 당장 시작해보세요. 단, 배부를 때 보세요. 빈속에 보면 저처럼 냉장고 털게 됩니다.
시즌 3까지 나와 있는데, 볼수록 카르미의 요리가 진해지고 감정도 깊어져요. 중간에 끊기가 어렵습니다. 퇴근하고 가볍게 한 화만 볼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새벽까지 보는 그런 드라마예요.
그리고 주말에 시간 여유 있으면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 한번 만들어보세요. 재료도 구하기 어렵지 않고, 생각보다 집에서도 충분히 맛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뭐 먹을지 고민이라면, 이미 답 나왔잖아요.
육수에 흠뻑 적신 빵, 얇게 썬 소고기, 아삭한 피클 채소. 시카고는 못 가도 그 맛은 우리 주방에서 만들 수 있어요.
